불모지와 다름없었던 한국의 비철금속 사업을 태동시켜 30여년간 이끌면서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비철금속 강국의 지위에 올려놓은 주인공, 모든 탄약의 국산화로 자주국방의 토대를 마련한 방위산업의 대부
류찬우(柳纘佑) 회장.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99년 11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류찬우 회장은 사업보국의 사명감과 세계적 전문기업 육성이라는 경영철학으로 우리나라 기초산업 태동기부터 평생을 오로지 비철금속 한 분야에만 매진, 세계 최고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종합 신동기업 풍산을 일구었다.
국내 기간산업 건설과 수출증대에 앞장서며 방위산업에 헌신한 30여년의 경영활동 중에
18년을 한국방위산업진흥회장으로 재임했던 방위산업 역사의 증인으로서,
모든 탄약의 국산화를 실현하여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1960년대말 조국의 부름을 받고 일본에서 모은 1천만달러 전액을 국내에 투자한 이래 타 분야 확장에는 일절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기초소재를 생산하는 동(銅)산업 한 가지 업종에만 전념했다.
그는 하나라도 전문화시켜야만 세계적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일관하며 오늘날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모범적 기업가상을 정립했다.
더불어 향토 기업인으로서 사재를 출연해 안동 하회마을 일대를 다듬고 서애 류성룡 선생의 업적을 선양하는 많은 사업을 벌여 전통문화 계승과 지역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장학재단과 교육재단 설립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장학제도를 확충하는 등 일생을 국가안보, 경제발전, 사회공헌의 전 분야에 걸쳐 헌신한 모범적 국민상을 실천했다.
故 학록(鶴麓) 류찬우 회장
1920~1940
경북 청송 덕천마을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출생
청송 공립보통학교 졸업
대구공립직업학교(현 대구공업고등학교)졸업
1950~1960
미국인 무역상사 Tradeship사 입사
풍산산업주식회사 설립, 무역업 시작
일본으로 건너가 Tradeship사 일본지사 무역업 경영권을 인수
풍산금속공업주식회사(현 주식회사 풍산) 설립
1970~1980
서애선생기념사업회 설립
대한테니스협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이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국방위 산업진흥회 회장 취임
전국경제인연합회 방산특별분과위원회 위원장
주식회사 풍산 회장 취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90
병산교육재단 이사장 취임
학록장학문화재단 설립
영면
03
동탑산업훈장06
은탑산업훈장12
수출유공억불탑09
금탑산업훈장02
국민훈장 동백장11
국민훈장 무궁화장
먹을 것도 해결할 수 없던 선비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류 회장은 직업학교를 마친 후 가난의 굴레를 벗어 보고자 어린 나이에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끝에 195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일본에서 무역업에 성공,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1960년대말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한국정부의 해외교포 자본유치 정책에 호응, 도일 10년만에 귀국한다.
조국의 부름으로 돌아와 그가 일본에서 모은 1천만달러 전액을 투자하여 세운 것이 바로 오늘의 풍산이다.
류 회장은 기업경영에서 '무엇을 위해'와 '어떻게'라는 명제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였으며, 시종일관 자신의 이 원칙을 지키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하나의 제품에 집중화하지 않는 한 세계적인 기업이 될 수 없습니다.
또 내가 돈 버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면 나는 도박을 하는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
물론 사업가라면 이윤을 창출해야 하지만, 동시에 유용하고 성공적인 기업경영을 통해서 국가에 봉사해야 하고 국가는 이러한 산업발전에 따라 부강해지는 것이지요.
내가 동제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국가방위를 위한 탄약도 생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군이 필요로 하는 탄약의 자급화에 매우 강한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강했더라면 16세기의 임진왜란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재상이었던 나의 선조[서애 류성룡]께서도 군사력이 허약함을 탄식하고 징비록이란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당시 조선이 얼마나 국방에 허술했는가를 말해주는 동시에 조선이 장차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선조의 한이었고 나는 그 분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류 회장의 모든 경영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업보국으로 귀착되며, 또한 그 방법론으로 전문화라는 매우 절제된 길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초 재미 인류학자인 테네시대학교 김중순 교수는 풍산을 모델로 '한국의 산업문화-풍산의 민족학'(The Culture of Korean Industry - An Ethnography of Poongsan Corporation)이란 영문 단행본을 통해 류찬우 회장의 경영철학과 도덕관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류찬우 회장은 그의 사업경영을 부르주아적 축재가 아닌 부국과 결부시킨 데서 사업의 정당성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당성은 건설적인 기업활동을 애국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의 논지와 부합되는 것 같다. 한국의 다른 재벌그룹들은 모든 사업분야에 손을 뻗쳐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 시장정보채널을 활용하며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왕국을 건설한 반면, 그의 경영관은 한 가지 제품의 생산에 매진한다는 데 기초하고 있다.”
류 회장의 전문화 추구는 무분별한 사업확장으로 기업이 부실화됨으로 인해 사회에 죄를 지었던 많은 기업들에 대한 강한 반론이며, 궁극적으로는 전문화를 통해 기술을 축적하고 좋은 품질, 첨단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기업의 존립기반인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이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류 회장이 다른 업종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안강 종합탄약공장이 준공되었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흡족해 하면서 신동산업 외에 하고 싶은 사업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도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때 류 회장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서 정중히 사양했다. 1970년대 중동붐이 일었을 때에도 국내 대다수 재벌들이 앞다투어 건설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류 회장은 신동산업에 집중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풍산개발이라는 건설회사마저 매각했다.
류 회장은 이처럼 전문화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설정한 정도(正道) 이외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문어발식 기업확장으로 일부 재벌들이 국민적 반감을 샀을 때에도 풍산은 비업무용 땅을 한 평도 보유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 심지어 서울 본사의 사옥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류 회장은 "땅 살 돈으로 생산설비 하나를 더 들여 놓겠다."라며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렇듯 철저한 전문화의 결과로 풍산은 이 부문에 관한 한 생산, 기술, 시장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 풍산의 가장 큰 저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류찬우 회장은 풍산 설립 이래 산업발전과 더불어 급속히 늘어나는 국내 신동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온산공장을 확장하는 등 총 25만톤에 달하는 대규모 생산능력을 일찍이 1980년대말에 갖췄고 과감히 국제화 프로젝트를 추진, 세계일류화의 청사진을 실행에 옮겼다.
1992년 기술선진국인 미국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세계 3대 생산능력과 튼튼한 시장 기반, 그리고 국제적 경영체제를 갖추었다.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전문화해서 한 가지라도 완벽하게 해야 하는 것이 기업입니다. 관련된 분야, 즉 소재부터 리드프레임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금형, 도금 같은 분야까지는 계속 발전시켜 나가지만, 전혀 무관한 토목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사업은 절대 안합니다."
류찬우 회장은 당시 반도체 산업의 밝은 전망을 확신하고 반도체 중요부품인 리드프레임 소재를 생산할 계획으로 미국의 올린(Olin)사에 라이센스 제공을 요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에 바로 류 회장은 소재의 자체 개발을 결심하고 1977년 이 일에 착수, 7년만인 1984년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신소재를 개발해냈다.
PMC102로 명명된 이 소재는 당시 세계 리드프레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올린사의 소재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후 모토롤라 등 세계 굴지의 반도체회사에 공급을 시작했고, 그 제조기술을 독일의 스톨버거(Stolberger Metalwerke)사에 수출, 당시 선진국에 대한 한국의 첨단기술 수출 1호를 기록했다.
풍산이 생산하는 동 및 동합금 소재는 모든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소재이다.
따라서 수요 산업이 질 좋은 소재를 싸게 공급받지 않고서는 산업 전반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류 회장은 이런 소재의 공급을 계속해서 수입에 의존한다면 우리 산업이 이들 국가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방위산업 역시 자주국방과 직결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 두 분야는 기업가에게 결코 매력적인 사업이 아니었다. 막대한 기술과 자본을 투자하고도 쉽게 수지를 맞출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으며, 특히 방위산업은 정부의 주문에만 의존해야 했기에 당시 경제계에서는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이같은 특성 때문에
류 회장에게는 여러 번의 시련이 닥쳤다. “내가 사서 왜 이 고생을 하나”하는 탄식도 했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일본에 계속 머물렀거나, 귀국해서도 부동산 투자나 손쉬운 소비재산업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난관도 귀국을 결심하며 다짐했던 류 회장의 국가관을 꺽지는 못했다.
풍산이 탄약생산업체로 지정되면서 류 회장은 공장부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전국 어디나 원하는 곳에 입지를 택할 수 있었다. 대도시 부근에 공장을 세우면 부동산 투자 효과도 노릴 수 있다는 것을 사업가인 류 회장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선택한 곳은 경상북도 월성군 안강읍이었다. 6 25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 곳을 택한 것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이들의 정신이 서린 장소에 자주국방의 의지를 실현할 탄약공장을 세우자는 취지였다.
류 회장은 평소 사원들에게도 "여러분이 해온 일은 군에서 적과 싸우는 것 이상으로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 풍산은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이지만
지금 어느 큰 기업보다도 보람있고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격려했다.
'풍산'이라는 상호도 풍산 류(柳)씨인 그의 본관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선조 때 명재상이자 유학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12대손인 류 회장은 평소 선생을 흠모하여 1976년부터 서애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각종 선양 사업을 벌여 왔다.
병산서원을 복원하고, 서애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을 건립하는 한편, 서애 선생의 저서를 집대성한 '서애전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서애관'이라는 체육관을 지어 기증한 것도 같은 취지에서였다. 이는 대대로 선비였던 그의 가풍과 선조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며,
방위산업에 참여하게 된 데에도 서애 선생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풍산의 중견사원들은 매년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연수를 받는다.
이것은 물론 선비정신의 계승과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기 위한 류 회장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서원 연수는 미국에까지 소문이 나 '태평양시대(The Pacific Century)'라는 10부작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연수장면을 취재, 1992년 미국의 공영방송 PBS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되기도 했다. 이들은 서원연수를 현대산업이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힘을 수용하는 방법의 한 예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처럼 류 회장 개인의 가치관이나 풍산의 기업문화 저변에는 유교적 전통의 가치관과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때로는 엔지니어들에게도 조언을 할 만큼 해박한 그의 전문지식은 가장 많이 움직이고 끊임없이 생각하며 현장과 함께 하면서 몸으로 익힌 경험의 산물이기도 하다.
제조업의 심장은 바로 제품을 만드는 생산현장이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늘 현장에 있음으로써 산 지식을 얻으며 그 지식을 현장에 반영했다.
칠순을 훨씬 넘긴 고령에도 불구하고 해외출장에서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곧바로 지방 공장으로 내려가 일을 볼 정도로 류 회장에겐 현장이 중요했다.
"틈날 때마다 공장을 돌며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잡곤 합니다. 회사의 모든 것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지요. 4개 공장의 어느 기계가 어디에 있고, 무엇에 쓰이는지 거의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류 회장의 ‘현장주의’는 풍산 초창기 부평공장을 건설할 당시 근로자들과 현장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부터 계속됐던 변하지 않은 철학이자 행동양식이었다.
비단 생산현장뿐만 아니라 판매현장에서도 류 회장은 늘 일선에서 뛰었다.
공업화 초기였던 1973년 내수가 미미해 풍산이 첫 번째 위기를 맞았을 때, 우연히 대만에서 미국을 통해 동합금 소재로 만든 주화용 소전(素錢)을 구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류 회장은 그날로 대만으로 날아가 1차로 360만 달러어치의 주화공급계약을 따내고 20%의 선급금도 받아냈다.
1984년에도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반도체 리드프레임용 소재인 PMC102를 개발했을 때도 류 회장은 이 소재를 갖고 실리콘밸리에서 열렸던 SEMICON WEST라는 반도체 전시회에 나갔다. 전시장을 차려놓고 그는 반신반의하는 세계 굴지의 반도체메이커 대표들에게 PMC102를 직접 홍보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류찬우 회장의 이러한 노사관은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직업학교에 진학했다. 소년 류찬우는 15살이 되던 해에 일본으로 밀항해 고학할 생각을 품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그의 주머니엔 20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피나는 싸움의 시작이었다. 일본행 여비 20원을 벌기 위해 조선방직에 인조견직공으로 취직했고, 그 뒤에는 삼촌이 시작한 양조장 일을 맡아 하기도 했다. 안동에서 도자기를 굽는 일도 했다. 양조장 일을 할 당시 남북한을 합한 전국 주류품평회에서 2위에 입상을 했었는데, 이는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류 회장이 평소 자신의 일에 얼마나 치열하게 임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고된 생활 속에서도 그는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배움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의록을 구해 밤새워 읽거나 남의 학교에 들어가 청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비로소 류 회장의 일본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기업주가 됐지, 처음부터 기업주로 태어난 것은
아니란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주영 회장도, 일본의 마쓰시타 회장도 국졸이 전부이지만 고생 끝에 만인이 존경하는 훌륭한 경영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분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배우고, 더 좋은 여건하에 있는 여러분들도 '나도 훌륭한 경영인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갖고 기업주와 노동자가 처음부터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류 회장의 이같은 노사개념에 대한 언급은 자신의 평생 체험에 바탕을 둔 솔직한 소견이자, 사원들에 대한 충고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시각의 뿌리는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기회균등'과 '노력에 대한 과실보상'이라는 원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나는 이 나라 어느 재벌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일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결코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나의 목표에 충실했기에 내가 걸어온 길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류찬우 회장이 가졌던 독특한 신념과 일관된 실천은 기업의 성공이라는 결과를 떠나서 그가 철학을 가진 한 인간으로 바로 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기업하는 사람은 철학도 윤리도 없이 오로지 돈만 쫓는 사람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바꿔 놓기에 충분할 것이다.
사람이 먹기위해서 살수는 없다.
이 나라 사람이라면 조국을 위해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죽어야지!
남이 못하는 일이지만 나라에 꼭 필요한 일을 하겠다.
(회사 창립시절 비철금속산업과 방위산업에 투신하며)진정한 기업인은 누가 하든 국가를 위해 꼭 해야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남이 안하거나 못하는 일에 뛰어들어
마침내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것이다.
무슨일이든 한가지라도 끝을 맺어야죠.
한가지에만 전력투구하다보면 세상에 안되는 일이 없다고 봅니다.
내가 시작한 일만큼은 세계를 쥐고 흔들 정도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우물을 파더라도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라도 세계최고를 만드는것이 민족기업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것이며,
동시에 세계화로 가는 길이다.
개인기업이라 하더라도 사회공기업이며
기업의 발전을 통해 국가와 겨레에 공헌하고 기업도 함께 번영해야 한다.
기업을 운영하는 것과 돈을 버는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먹고 살기위해서 무슨일을 하는것과는 달리,
사명감을 가지고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것을 제공해야 하는것이 기업입니다.
20여년동안 방위산업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다보니
4백년전 나의 선조인 서애선생께서 왜적을 물리치는데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이며,
국방에 여념이 없었던 그 유지를 만의 일이나마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나도록 고맙고 신명에 감사할 따름이다.
선조들의 높은 선비정신을 후학들에 길이 전하고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차원에서도 장학사업은 마땅히 활기있게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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